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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겨울이 봄을 이기지 못한다

세상에는 이길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근시안으로 보면 이기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일이 틀어진다.   봄이 왔다. 봄은 소리소문 없이 온다. 새각시처럼 버선발로 살며시 다가온다. 몇 주 전만해도 폭설이 내리고 온천지가 눈에 덮혀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이토록 찬란한 봄이 오다니! 겨울이 아무리 혹독해도 봄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다. 이별이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는 것처럼.    ‘봄 눈 녹듯이’ 강이 풀리는 소리 들려오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 내린다. 뒷뜰 연못에서 서걱이던 마른 갈대들도 아지랑이를 품으려고 봄볕에 술렁인다. 다시 사랑을 시작할 조짐이 여기 저기 보인다.   ‘봄이면 네가 찿아올까/ 햇살에 눈이 녹듯이 그렇게/(중략) / 어느새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얼었던 내 맘에 꽃이 피어나듯이/ 한눈에 너를 알아볼 거야/ 혹시나 내가 너를 못 알아봐도/ 나를 찾아줘’-한올의 ‘봄날에 만나자’ 중에서   봄은 축복의 손으로 대지를 어루만진다. 생명을 잉태하는 기적을 손 끝마다 매달고 가장 밝고 아름다운 빛깔로 마술의 향연을 벌인다. 어떤 유명한 화가도 현란한 봄을 색깔을 팔레트에 담아내지 못한다. 봄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대지에 펼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세기 2:9).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에덴동산 한가운데 심은, 영원한 삶을 주는 생명수(生命樹)를 가리킨다. Lucas Cranach가 그린 ‘인류의 타락(The Fall of Man)’에는 벌거벗은 채 선악과를 먹는 아담과 이브의 왼쪽에 생명나무가 보인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다시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한다.   눈 깜박할 시간, 나릇한 봄 향기에 취해 잠깐 오수를 즐기는 사이, 봄볕이 앞뜰과 뒷뜰에 생명수(生命水)를 뿌리며 봄의 향연을 펼친다. 열병식 하듯 나란히 줄을 서서 제일 먼저 여린 목을 내민 건 튤립이다. 그 옆에 납작 엎드린 보랏빛 군자란이 기지개를 켠다. 아네모네와 크로커스는 사랑이 뜨거워질 무렵 필 요량이다. 개나리는 가지마다 앙증맞은 입술을 뾰족히 내밀고 사랑의 손길을 기다린다. 초가을에 뿌린 팬지는 ‘사랑의 추억’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감감 무소식이다.   돌보지 않아도 무시로 피는 코스모스는 한더위를 참고 견디며 가을 연가를 부를 채비를 한다. 모진 바람에도 가늘고 긴 목을 깎지 않는 코스모스는 청상에 홀로 되신 어머니를 닮았다. 먼저 핀 꽃들이 정원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을의 길목에서 가는 손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한다.   미움이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 절망이 희망의 싹을 자를 수 없고, 비천함이 고귀함을 따라갈 수 없고, 비굴함이 용기와 대적하지 못한다. 졸부가 최부잣집 곳간을 채울 수 없듯이 무식이 유식을 따라잡지 못한다.   하늘이 땅을 품고, 땅이 하늘을 우러러 꽃은 피고 진다. 삶이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못다한 사연들이 허공에 사라져도, 봄이 오면 새들은 슬프고 아름다운 노랫말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겨울 생명나무 열매 생명 나무 노랫말로 하늘

202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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